프리다 칼로로 알려진 마그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Magdalena Carmen Frieda Kahlo y Calderón)(1907–1954)은 1907년 7월 6일 멕시코 코요아칸(Coyoacán)에서 멕시코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칼로의 예술적 소명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유명한 사진작가이자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예술가의 꿈을 키웠다. 미술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과 매력에 이끌려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 반 라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전기를 읽으며 서양 미술사도 공부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18세에는 심각한 버스 사고로 평생 만성적 고통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사고가 나고 한 동안 큰 고통을 겪었지만, 이러한 역경을 극복하고 그림을 계속 그리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던 칼로는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하고 멕시코 시티의 예술계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를 만났고, 두 사람은 1929년에 결혼했다. 1년 후부터 1933년까지 부부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샌프란시스코, 디트로이트, 뉴욕에서 생활하며 예술적 지평을 넓혀갔다.
프리다 칼로, 레오노라 캐링턴, 레메디오스 바로, 소피아 바시, 앨리스 라혼, 브리젯 베이트 티체노르, 마리아 이즈키에르도
1930년대부터 멕시코에서 활동한 여성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떠올리면, 신비로운 항해, 괴물 같은 생명체, 환상적인 풍경이 그려질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심오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한 초현실주의는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정립된 후, 빠르게 파리의 아방가르드에 스며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위협이 다가오자, 수많은 예술가들이 유럽을 떠나 멕시코 시티를 향했고, 그 곳에서 예술적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유럽에서 망명한 초현실주의 화가들 – 레오노라 캐링턴, 앨리스 라혼, 레메디오스 바로 – 은 1940년대 초 멕시코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다양한 신화와 극적인 풍경이 자신들의 감성과 깊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예술적 자유도 새롭게 누릴 수 있었다. 또한 프리다 칼로와 마리아 이즈키에르도 같은 기존의 유명 여성 화가들도 만났다. 칼로는 자신의 삶에서 영감을 얻어 은밀한 자화상과 집에서의 일상을 표현했지만, 이즈키에르도는 초현실주의적 요소와 멕시코의 전통적인 모티프를 혼합한 몽상적인 회화를 제작했다.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무의식과 상징주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바로는 내밀한 신화를 탐구했고, 캐링턴과 앨리스 라혼은 세계 신화와 토착 전통을 연결했다. 자연과 오컬트 영역에 매료된 이들은 멕시코의 배경에 깊은 영향을 받은 풍부한 예술적 표현을 통해 난해한 토착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탐구했다.
캐링턴, 바로, 라혼 뿐 아니라 브리짓 베이트 티체노르와 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게도 망명 생활은 창의적으로 큰 결실을 맺었고, 이들은 프리다 칼로, 이즈키에르도, 소피아 바시와 함께 지적 깊이와 정밀함으로 가득한 매혹적인 세계를 창조했다. 이 전시는 프리즈 아트 페어와 동시에 개최되며,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멕시코에서 여성 작가들이 표현한 초현실주의 운동의 활기찬 발전과 깊이를 포착하여 확장하는 전시가 될 것이다.
레오노라 캐링턴(1917~2011)은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셔(Lancashire)의 부유한 앵글로-아일랜드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녀는 전통적인 가족에 대한 사회적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켈트족과 아일랜드 민속 설화에서 위안을 찾았다. 사람, 동물, 요정, 여신, 드루이드(druid, 성직자를 비롯한 고대 켈트족의 고위 전문직 계급)가 환상적인 모험을 추구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내용의 전설들은 캐링턴의 상상력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작가 생활 전반에 걸쳐 영감을 주었다. 격동의 학창 시절을 보낸 후, 1935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아메데 오장(Amédée Ozenfant)의 새로운 회화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그곳에서 캐링턴은 《제1회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First International Surrealist Exhibition》를 관람하고 막스 에른스트(Max Ernst)를 만났다. 그와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1937년 파리로 떠났다.
“꿈의 세계와 현실 세계는 같다.” 레메디오스 바로
소피아 바시(1913~1998)는 멕시코의 화가이자 글을 쓰는 작가로, 초현실주의 작품 세계와 파란만장한 사생활로 주목받았다. 그녀는 1913년 멕시코의 베라크루스 주에 위치한 카메리노 Z. 멘도자 시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그림 그리는 법을 독학으로 터득했다. 1965년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작품 45점 중 40점이 팔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에는 멕시코의 갤러리 플라스티카(Galería Plástica)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의 리스 갤러리(Lys Gallery)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예술적 여정은 계획대로 펼쳐지지는 않았다. 1968년, 그녀는 사위 체사레 다카로네(Cesare d’Acquarone) 백작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자수했다. 이탈리아 귀족 사위의 죽음은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세간에서는 그녀가 딸에게 책임을 돌렸다고 추측했다. 이후 5년 동안 감옥에서 E.L.C.(‘en la cárcel(교도소에서)’)라고 새겨진 275점의 그림과 두 점의 벽화, 독백 연극
앨리스 라혼(1904-1987)은 1904년 6월 8일 프랑스 동부의 슈네시 부용(Chenecey-Bouillon)에서 태어났다. 20대에 파리로 이주하여,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를 위해 모자를 제작했고, 사진작가이자 화가인 만 레이(Man Ray)의 모델이 되었으며, 호안 미로(Joan Miró)와는 예술가 동료로 지냈다. 1931년 오스트리아 화가 볼프강 파알렌(Wolfgang Paalen)을 만나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 이끄는 초현실주의 모임을 소개받았다. 그로부터 3년 후 라혼과 파알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후 파리에서 라혼은 주로 시를 쓰는 데 집중했고, 1936년 이브 탕기(Yves Tanguy)의 판화 작품이 삽입된
브리젯 베이트 티체노르(1917~1990)는 보헤미안적이고 시크하며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괴짜 같은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다. 영국의 저명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를 오가며 르네상스 거장들의 기법을 배웠고, 초현실주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로부터 사사받았다. 디자이너 코코 샤넬을 위해 일했던 어머니의 소개로 프랑스 디자이너와 다른 명품 브랜드의 모델로도 활동했는데, 이 때 어빙 펜(Irving Penn)과 만 레이가 사진 촬영에 참여했다. 뉴욕에 사는 동안에는 잡지
마리아 이즈키에르도(1902~1955)는 매년 성모 마리아 순례로 유명한 작은 마을 ‘산후안 데 로스 라고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는 1923년 남편과 함께 멕시코시티로 이주했다. 극도로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란 그녀였지만, 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멕시코 시티의 활기찬 문화적 르네상스는 그녀의 예술적 창의성과 자유에 활력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이주한 지 5년 후 남편과 이혼하고 1927년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아(Academia de San Carlos)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가 입학한 다음 해에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가 관장이 되었는데, 그는 그녀의 작품에 감탄을 표했다. 마리아 이즈키에르도는 짧은 학창 시절을 보낸 후, 유명 화가 루피노 타마요(Rufino Tamayo)와 연애를 시작했다. 4년간 연인 관계를 이어가는 동안, 상대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받으며, 유럽 아방가르드 사조를 반영하는 동시에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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